[푸른 꽃]의 노발리스

헤르만 헤세가 읽은 노발리스의 이론

"노발리스의 모토이자 결론은 내면화를 통한 깊은 통찰이다. 노발리스의 이론을 짧게 간추리자면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이 영원한 법칙의 정신은 모든 영혼 속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 인간의 모든 교양과 이해는 자신의 소우주 속에서 이 정신을 인식하고 자각하며 그로부터 모든 새로운 인식의 척도를 마련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에서.

by 다오얀 | 2013/01/20 12:31 | | 트랙백 | 덧글(0)
어떻게 살 것인가
초판 1쇄 2012년 1월 6일; 초판 5쇄 2012년 2월 29일/사라 베이크웰 지음 김유신 옮김/책읽는수요일

읽는 중인데, 저자가 몽테뉴 연구를 많이 했다. [수상록]은 물론이고 가외 자료들까지 죄다 섭렵하고 자신의 관점을 세워서 썼다.
나는 편집의 필요에서 읽고 있는데 일에도 도움이 많이 된다.
목차를 보면 몽테뉴의 책이나 그의 삶을 통해 자기계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본문을 읽어보면 미끼임을 알 수 있다.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몽테뉴의 삶이나 생각 등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인문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제목이나 목차는 어찌 보면 당의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by 다오얀 | 2012/08/24 16:57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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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철학 고유의 난제, 철학이 제기하는 이율배반, 철학이 빠지는 모순, 적대적인 학파의 분열, 체계간의 격렬한 대립은 그 대부분이, 우리가 실리를 목적으로 하여 보통 사용하고 있는 방식을 실재적인 것에 관하여 무관심한 인식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 기인한다. 이러한 것들은 주로, 우리가 움직이는 것 속에 다시 들어가서 이 움직이는 것과 더불어서 움직이지 않는 위치들을 하나하나 통과하는 대신에, 움직이지 않는 것 속에 자리잡고 앉아서 움직이는 것이 통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실재는 경향이요 따라서 동태이지만, 지각이나 개념은 실재를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상기한 철학적 난문들은 우리가 지각이나 개념을 가지고 실재를 재구성하려고 하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정지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으로 동태를 결코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에 반해서 동태를 체득하고 있으면, 사고에 의하여 거기에서 원하는 만큼의 정지를 이끌어낼 수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고정된 개념이 움직이는 실재로부터 사고에 의하여 추출될 수 있다는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개념의 고정성을 가지고 실재의 동태를 재구성하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독단론은 여러 가지 체계의 건설자로서 언제나 이러한 재구성을 시도해왔던 것이다.
5. 독단론이 그러한 시도에 실패할 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회의론적, 개념론적, 비판주의적 제학설, 요컨대 우리의 정신에 대하여 절대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거부하는 모든 학설이 명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력이요 또 이러한 무력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직한 기성적 개념을 가지고 살아 있는 실재를 재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거기에서 우리가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실재를 파악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의 상대성에 관해서 주어진 논증들은 하나의 근본악에 오염되어 있다. 즉 그러한 논증들은 자신이 공격하고 있는 독단론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식이 필연적으로 윤곽이 고정되어 있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개념에 의하여 유동하는 실재를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6.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정신이 그와는 반대의 행로를 밟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움직이는 실재 속에 들어가서, 실재의 부단히 변화하는 방향을 취하여, 마침내 실재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은 비상한 노력을 하여 평상시의 사고활동의 방향을 역전시키어야 하며, 자신이 사용하는 범주를 뒤집어야 하며, 그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개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유동적인 개념에 도달하고, 이 개념은 실재의 온갖 우여곡절을 추적해갈 수 있으며, 사물의 내적 생명의 운동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진보적인 철학이 건설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이 학파간에 주고받는 논쟁에서 해방되어 여러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러한 문제들을 제출하기 위해서 선택한 기교적인 술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한다는 것은 곧 사고활동의 습관적인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7. 이러한 역전이 조직적으로 시행된 일은 일찌기 없었지만, 그러나 인간의 사고의 역사를 깊이 연구해보면, 과학상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철학에 있어서 생명이 긴 업적이나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전에 힘입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사용하고 있는 연구방법 가운데에서 가장 유효한 방법은 미분해석거니와, 이 방법은 다름아닌 이 역전에서 나온 것이다. 근대의 수학은 바로 이미 완성된 것 대신에 형성되고 있는 것을 대치하기 위한 크기[양]의 발생을 더듬어 가기 위한, 운동을 외부로부터 그리고 그 드러난 결과에 있어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그리고 변화해가는 그 경향에 있어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요, 요컨대 사물의 윤곽의 움직이는 연속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by 다오얀 | 2012/02/15 11:53 | 哲學의 諸問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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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실재에 대한 외적 관점이나, 또는 그 실재를 둘러싸고 있는 보다 큰 원의 수만큼 많은 상이한 체계들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개념은 대상의 구체적 통일을 다수의 부호적 표현으로 분할한다고 하는 불편한 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철학을 여러 학파로 분할하여, 각 학파는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고, 자기의 명패를 골라서, 다른 학파를 상대로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승부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철학은 이러한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든가, 그렇지 않고 정신의 진지한 직무라면, 직관에 도달하기 위하여 개념을 초월할 필요가 있든가, 그 어느 것이다. 물론 개념은 철학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과학은 개념에 의하여 연구를 하는 것이 가장 통상적인 일이며, 철학은 다른 과학이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이 개념을 넘어서는 때에만, 또는 적어도 철학이 경직한 기성적 개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우리가 평상 취급하고 있는 개념과는 아주 다른 개념을, 다시 말하면 유연하고 가동적이며 거의 유동적이며 직관의 잘 잡히지 않는 형태에 언제나 꼭 들어맞는 표상을, 만들어내는 때에만 철학은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 철학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속 속에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아자신에 의한 자아의 지속의 내적 절대적 인식은 가능하다. 그러나 철학이 직관을 요구하고, 또 이 경우 직관을 획득할 수가 있지만, 과학은 역시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분석의 역할과 직관의 역할과를 혼동하는 데에서, 학파간의 논쟁과 체계간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1. 외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정신에 직접 주어진 실재가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철학자들의 관념론이나 실재론에 반해서 상식이 정당하다.
2. 이 실재는 동태이다. 실재하는 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형성되고 있는 것뿐이요, 유지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직 변화하는 상태뿐이다. 정지는 어디까지나 외견뿐이요, 오히려 상대적일 뿐이다. 연속적인 유동 가운데에 있는 우리의 본래의 자아에 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우리를 실재의 내부에로 인도하거니와, 우리는 이 실재를 모범으로 삼아서 다른 실재들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발생기의 상태에 있어서의 방향의 변화를 경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모든 실재는 경향이다.
3. 우리들의 정신은 확고한 지점을 찾는 것이므로, 일상생활의 과정에서는 상태와 사물을 표상하는 것을 주요한 기능으로 삼고 있다. 우리들의 정신은 실재적인 것의 불가분의 동태를 간격을 두고 거의 순간적으로 바라다본다. 그렇게 해서 정신은 감각과 관념을 얻는다. 그 결과 정신은 연속 대신에 불연속을, 동태 대신에 안정을, 변화도상에 있는 경향 대신에 변화와 경향의 방향을 표시하는 고정된 점을 대치한다. 이러한 대치는 상식, 언어, 실제생활에는 필요하며, 또 이제 우리가 규정하려고 하는 일정한 정도까지는 실증과학에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지성은 그것이 자연적 경향에 따르는 경우에는, 한편으로는 고정된 지각에 의해서 활동하며, 또 한편으로는 안정된 개념에 의해서 활동한다. 지성은 부동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이 부동성에 비추어서만 운동을 생각하고 표현한다. 지성은 기성의 개념 속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실재를 얼마큼씩 마치 그물 속에 잡아넣듯이 개념 속에 잡아넣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실재적인 것의 내적인 철학적인 인식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때 하나하나의 개념은 (하나하나의 감각도 결국은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들의 활동이 실재에 대하여 제출하는 실용적인 질문이요, 이 질문에 대하여 실재는 응수의 편의상 가나 부로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활동은 실재의 본질 그 자체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by 다오얀 | 2012/02/14 16:08 | 哲學의 諸問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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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에 철학자의 유일한 목적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있어서 실생활에 보다 유용한 정신적 습성의 저해를 받기 쉬운 일정한 활동을 불러일으켜주는 일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이미지는 적어도 우리를 구체적인 것에 머무르게 한다고 하는 장점을 가진다. 어떠한 이미지도 지속의 직관을 대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아주 다른 여러 종류의 사물에서 따온 여러 가지 이미지를 많이 모으면, 그 작용이 집중됨으로써 의식을 일정한 직관이 파악되는 점에로 정확하게 이끌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 너무나 단순한 개념의 불편한 점은, 그것이 사실은 기호에 불과하여, 그것이 기호화하고 있는 대상을 대신하고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는 데에 있다. 자세히 고찰해보면, 하나하나의 개념은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과 다른 대상들과의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개념은 이미지 이상으로 대상과 이 대상에 유사한 다른 대상들과의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교는 유사를 밝히는 것이었고, 유사는 대상의 성질이며, 성질은 아무리 보아도 그 성질을 소유하고 있는 대상의 한 부분인 듯하기 때문에, 우리는 개념에 개념을 병치해가면 부분을 가지고 대상의 전체를 재구성하게 될 것이며, 이를테면 대상의 지성적 등가물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것을 용이하게 납득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통일성, 다양성, 연속성, 유한적 또는 무한적 분할성 등의 개념들을 나란히 늘어놓으면 지속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착각이 있다. 여기에 또한 위험이 있기도 하다. 추상적 관념이 분석에, 다시 말하면 대상을 다른 모든 대상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들 추상적 관념은 직관을, 즉 대상의 본질적이며 고유한 점의 철학적 연구를 대신할 수가 없다. 과연 한편으로는 이러한 개념들을 차례로 이어놓아도 우리는 대상의 인공적인 재구성에는 이르지 못하고, 개념은 대상의 어떤 보편적인 면, 이를테면 몰개성적인 면을 부호에 의하여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개념은 우리에게 실재의 그림자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므로, 개념을 가지고 실재를 파악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착각 외에도 또한 매우 중대한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개념은 추상작용을 함과 동시에 보편화의 작용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특수한 성질을 무한히 많은 사물들과 공통되는 것으로 다룸으로써만 그 특수한 성질을 부호에 의하여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개념은 언제나 그 본질을 어느 정도까지는 확장함으로써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어떤 성질을 그것을 구유하고 있는 철학적 대상 속에 다시 돌려보내면, 그 성질은 그 대상과 합치하며, 적어도 그 대상의 꼴에 꼭 들어맞아서, 똑같은 윤곽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성질을 철학적 대상으로부터 추상해서 개념으로 표현하면, 그 성질은 무한히 확장되고, 그렇게 되면 그 대상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까지도 포함하게 되므로, 그 대상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한 사물의 여러 성질에 관해서 우리가 구성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은 그 사물의 주위에 그보다 훨씬 큰 원을 개념의 수만큼 많이 그리지만, 그 하나하나의 원은 그 사물에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사물 자체에 있어서는 그 성질들은 그 사물과 일치하며, 따라서 전체가 일치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일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그 개념들 중의 어느 하나를 취하여, 그것을 가지고 다른 개념들을 다시 접합시키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개념에서 출발하느냐 저 개념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접합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통일성에서 출발하느냐 또는 다양성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지속의 다양적 통일을 달리 생각하게 된다. 요는 우리가 개념들 가운데의 어느 것에 무게를 두느냐에 달려 있는데, 이 무게란 것은 언제나 차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대상으로부터 추상된 개념은 물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by 다오얀 | 2012/02/13 08:14 | 哲學의 諸問題 | 트랙백 | 덧글(0)
철학의 제문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므로 다시 한 페이지씩 베껴 올린다.

by 다오얀 | 2012/02/12 09:07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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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외면적으로는, 그것을 지켜보는 나에게는 여러분의 팔은 우선 하나의 점을 통과하고 그 다음에 다른 점을 통과하며, 이 두 점 사이에는 또 다른 점들이 있으므로, 내가 이것을 세기 시작한다면 그 계산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부에서 보면 절대란 단순한 것이지만, 외부로부터 보면, 즉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보면, 절대는 그것을 표현하는 부호에 비하여, 언제까지 가도 화폐로 다 바꾸어주지 못할 금괴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런데 한번 붙잡으면 불가분적임과 동시에 하나하나 세어가면 끝이 없는 것은, 정의상 무한한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절대는 직관에 있어서만 주어질 수 있는데 반하여, 그 밖의 모든 것은 분석에 귀속된다고 하는 귀결이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가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대상의 내부에로 들어가서 그 대상 특유의 것, 따라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하나가 되기 위한 공감을 말한다. 그와 반대로 분석은 대상을 기지의 요소에로, 다시 말하면 이 대상과 다른 대상에 공통적인 요소에로 환원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분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그것과는 다른 것에 의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처럼 일체의 분석은 번역이요, 부호에 의한 설명이요, 연속적인 여러 관점에서 본 표상이거니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지금 연구하고 있는 대상과 이미 안다고 생각되는 대상과의 여러 가지 접촉을 주목하는 것이다. 분석은 대상의 주위를 맴돌지 않을 수 없도록 숙명지어져 있으되, 대상을 포용하려는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언제까지나 불완전한 표상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무한히 관점을 증가시켜가며, 언제까지나 불충분한 번역을 완성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부호를 바꾸어간다. 그리하여 분석은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나 직관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나의 단순한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실증과학이 분석을 관용적인 수단으로 삼고 있음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과학은 무엇보다 부호에 의해서 연구를 하는 것이다. 자연과학 가운데에서 가장 구체적인 생명의 과학조차도 생물과 생물의 기관, 생물의 해부학적 요소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형태를 고집한다. 즉 생명의 과학은 여러 형태를 가장 단순한 형태에로 환원하며, 결국 생명의 기능을 이를테면 생명의 시각적 부호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있어서 연구한다. 실재를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대신에 절대적으로 파악하며, 실재에 대하여 여러 관점을 취하는 대신에 그것을 직관하는 방법이 있다면, 요컨대 일체의 부호적인 표현이나 번역, 표상에 관여하지 않고 실재를 파악하는 방법이 있다면, 철학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부호 없이 해보려고 하는 학이다.
우리들이 누구나 내부로부터, 즉 단순한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 파악하는 실재가 적어도 하나는 있다. 그것은 시간을 통하여 흘러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그것은 지속하는 우리들의 자아이다. 우리는 다른 어떠한 것과도 지적으로 또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공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들 자신과는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 [순수지속]은 개념에 의해서는, 즉 추상적인, 보편적인, 또는 단순한 개념에 의해서는 더욱 표현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이미지도 나 자신의 유동에 관해서 내가 가지는 원래의 감정을 완전히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타내보려고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이 존재의 직관을 자기 자신이 얻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개념도 이미지도 그것을 결코 줄 수가 없을 것이다.
by 다오얀 | 2012/02/12 09:05 | 哲學의 諸問題 | 트랙백 | 덧글(0)
글쓰기
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인데 글은 쓰기가 싫다.
내 속에는 밖에 내놓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책으로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쓰기가 싫으며 잘 하지도 못한다.
보도자료 쓸 때마저 공자의 '술이부작'을 모토로 삼는다.
당연히 나의 모든 생각은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나의 바람을 포장한 것이다.
너무 많이 썼다. 그래도 의무감 같은 게 생겼다. 쓰긴 해야 한다는. 사적인 공간에서라도.
by 다오얀 | 2012/02/10 14:38 | | 트랙백 | 덧글(0)
中國通
2005년 2월 초판 1쇄/황의봉 지음/시대의 창

중국에 대한 정보 수집 차원에서 샀다.
절판이므로 헌책방에서 구했다.
아마도 <신동아>에서 연재했을 각계 중국 전문가 인터뷰를 모아 엮은 책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지금은 맞지 않는 대목도 있지만 중국 관심자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지나치게 큰 책 판형을 사용한 것 같다. 황의봉 기자는 중국 전문기자로 체크해둘 만한 필자다.
by 다오얀 | 2011/09/19 09:53 | 트랙백 | 덧글(0)
마지막 기회라니?
2010년 12월 초판 1쇄/더글러스 애덤스 마크 카워다인 지음 강수정 옮김/홍시

더글러스 애덤스는 글을 참 재미나게 쓰는 사람이다. 이 심각한 주제를 유머러스하게 쓰니까 읽을 때는 낄낄거리다가 나중에 가슴에 턱 하고 걸린다. 번역이 좋다. 마지막에 저자가 말하는 너무 쓸쓸하고 외로우니까라는 동물의 멸종을 막아야 하는 이유는 칼 세이건이 지구에 인간만 있기에는 너무 공간이 아깝다고 한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왜 이런 생각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암튼 재밌는 책이니까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기에는 안성맞춤. 
by 다오얀 | 2011/08/22 16:30 | | 트랙백 | 덧글(0)
광저우 이야기
2010년 10월 초판 1쇄/강정애/수류산방중심

디자인과 소재에 대한 관심에서 사 읽었다.
디자인은 서체를 보기 위한 것이었고, 광저우는 중국 남방의 중심 도시 광저우가 어떤 곳인가 하고 궁금해서.
광저우란 도시에 대해 일별하기에는 나쁘지 않다. 도판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도 쫄쫄하고.
그러나 텍스트의 함량 면에서는 저자의 관점이 들어갈 여지가 거의  없으므로 밋밋한 점도 있다.
책값 싸다. 4도에, 종이에 가능한 일인가.
by 다오얀 | 2011/08/03 09:18 | | 트랙백 | 덧글(0)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2006년 9월 초판 1쇄/김시천/웅진지식하우스

고전은 왜 읽는가.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읽는다.
아주 명쾌하다. 구태의연하고 케케묵은 고전에 대한 생각을 바꿔주는 책이다.
'신토불이'적 사고방식으로 중국 고전을 연구하는 저자의 글을 따라 읽다보면 '위기지학'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는 기회가 된다.
by 다오얀 | 2011/06/27 16:05 | | 트랙백 | 덧글(0)
결국 사장이 문제다
2011년 6월 초판 1쇄/홍재화/부키

나이가 들수록 직업 변화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현대 사회에서 전문화, 세분화란 말은 이 사태의 증거가 된다.
한 분야에서 얻은 직업적 기술은 너무나 편협한 것이라 타 직업으로의 이동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의 획득이 필요한데 그 기술을 획득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렇다 해도 수명이 길어진 만큼이나 더 오래도록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하므로 보다 안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읽었다.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부제가 컸다. 다들 3년을 못 넘기는데 저자는 15년을 넘겼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한테는 배울 만한 경험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었다.
사장으로 일하면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나 꼭 갖추어야 할 소질 등을 자신의 경험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풀어냈다.
저자가 사업하는 모습을 책 내용을 읽어가면서 내 머릿속으로 가상의 설정을 정하여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토록 하려면 기초를 단단하게 다져야 할 텐데, 그 기초를 다지는 작업의 하나로 이런 책을 읽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by 다오얀 | 2011/06/22 06:07 | | 트랙백 | 덧글(0)
염소의 맛
2010년 3월 초판 1쇄; 2011년 4월 초판 3쇄/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그레고리, 이혜정 옮김/열린책들

제목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매애매애 우는 염소를 고아 먹는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 염소는 수영장 물을 소독할 때 쓰는 염소였다.
거의 대사가 없고 등장하는 인물도 몹시 단촐하다.
작가가 감정을 전하는 방법은 미묘한 인물의 표정이나 반복되는 동작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다. 낯선 타인에게 처음으로 호감을 느끼고 그 감정이 깊어지는 과정을 과장하거나 억지로 힘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린다.
그나저나 이 출판사는 이만큼의 책에 이만 한 값을 매기고도 유지가 가능한 것인가. 책은 예쁘다. 
by 다오얀 | 2011/06/22 05:48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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