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와 똑같은 추리는 동일성에도 미친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이 여러 번 우리의 감관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해도 그것이 하나의 개체로서 언제나 동일한 것이라고 선뜻 생각한다. 그리고 지각이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일 우리의 눈이나 손을 끊임없이 그 대상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면 그 대상은 불변적이며 중단없는 지각을 전해주었으리라고 결론을 내리는 때에는 언제나, 우리는 그 대상에 동일성을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관의 인상을 넘어선 이러한 결론은 오로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근거를 둔 것일 수밖에는 없다. 또 우리는 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면 아무리 새로운 대상이 전에 감관에 나타났던 대상과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그 대상이 우리에게 대하여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보증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그와 같은 완전한 유사성을 발견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그것이 그 대상의 종류에 공통되는 것인가, 혹 어떤 원인이 변화와 유사를 일으키는 작용을 할 수 있었던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원인과 결과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는 바에 따라서, 대상의 동일성에 관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고 부르는 어떤 두 개의 대상을 주시하고 그와 같이 놀랄 만큼 중대한 관념을 낳아 놓는 인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이 대상들을 모든 면에서 검토해보기로 하자. 첫 눈에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그것을 대상의 어떤 특수한 성질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떠한 성질을 잡아보든지,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역시 원인과 결과라는 명목 아래에 들어오는 대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적 세계에나 내적 세계에나 원인 또는 결과라고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존재에 보편적으로 속하며 모든 존재에 대하여 원인과 결과라는 명목을 부여하는 성질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원인의 관념은 대상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서 유래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 관계를 밝히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로, 어떠한 대상이든 원인 또는 결과라고 생각되는 것은 서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어떠한 것도 그것이 현존하고 있는 시간 또는 위치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시간 또는 위치에서는 작용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들은 서로 원인과 결과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 흔히 있지만, 그들은 자세히 조사해보면, 보통 여러 원인의 연쇄에 의하여 결부되어 있으며 이 여러 원인은 상호간에,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과도 접근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리고 어떤 특수한 경우에 우리가 이러한 연관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는 역시 이러한 연관이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접근의 관계를 인과의 관계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원인과 결과에 필수적이라고 보려고 하는 두 번째 관계는 그다지 보편적으로 승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논쟁을 일으키기 쉬운 것이다. 그것은 곧 결과 이전에 원인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는 시간의 선행성의 관계이다. 어떤 사람은 원인이 그 결과에 선행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요, 어떤 대상이나 활동은 그것이 존재하게 된 최초의 순간에 있어서 산출적 성질을 발휘하여 자기 자신과 전혀 동시에 다른 대상이나 활동을 낳아놓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험은 대부분의 경우에 이 의견에 배치되는 것같이 보일 뿐 아니라, 우리는 일종의 추론이나 추리에 의하여 선행성의 관계를 확정할 수가 있다. 다른 대상을 산출함이 없이 일정한 시간 동안 충분한 완전성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은 그 자신이 자신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 이 대상을 불활동의 상태에서 밀어내어 비밀리에 소유하고 있던 힘을 발휘하게 하는 어떤 다른 원리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자연철학에 있어서나 정신철학에 있어서나 하나의 확정된 공리이다.
1995년 3월 초판 1쇄/훼이 샤오 통 지음 이경규 역/일조각
鄕土中國이라는 원제를 가진 이 책은 저명한 중국의 사회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이 썼다. 근대 이전에 학문이 통합적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근대가 진전되면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복잡다단해졌고 학문 또한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사회학도 그런 학문 가운데 하나다. 이제 백 년을 조금 넘긴 따끈따끈한 학문이다. 페이 교수의 연구성과는 그가 배운 지식 가운데 인류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그의 저작 가운데서 두께가 가장 얇은 책일 것인데, 내용까지 얄팍한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무척 홀시당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중국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 농촌과 농촌의 구성원인 농민의 전통적인 의식구조에 대해 논하고 있다. 외국에서 유학한 학자이니만큼 서양의 사례와 함께 설명해나가는데 은근한 재미가 있다. 지금까지도 이런 농촌에 살던 중국인의 인격구조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거니와 중국의 농촌과 중국에서 농민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이래 수천 년간 이어져온 그들의 속이 궁금하다면 일독할 만하다. 페이 교수의 다른 저작도 보고 싶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런 날이 올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이와 똑같은 의견은 철학의 많은 부문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요, 또 우리의 추상적 관념을 설명하는 데에 이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등변 삼각형도 부등변 삼각형도 아니며 또 변이 어떤 특수한 길이와 비율도 한정되지도 않은 삼각형의 관념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밝히는 데에 이용되는 것이다. 왜 철학자들은 이러한 정신적인 정치한 표상을 좋아하는가는 알기 쉽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와 같은 수단으로 그들의 사상의 많은 모순을 은폐하고 또 애매모호한 관념에 호소함으로써 명석한 관념의 단정에 복종하기를 거절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술책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누히 주장되어온 원리, 즉 우리의 모든 관념은 우리의 인상으로부터 모사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원리를 반성해보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원리에서 바로 다음과 같은 결론, 즉 모든 인상은 명석하고 정확하므로 인상으로부터 모사되는 관념은 반드시 그와 똑같은 성질을 가질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과오에서가 아니면 어떤 애매혼란한 것으로 함유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관념은 그 성질상 인상보다 빈약하고 희박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므로 관념이라고 해서 어떤 큰 비밀을 내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관념은 빈약하기 때문에 애매하다고 한다면, 개념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그러한 결점을 고쳐나가는 것이 우리의 직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때까지는 아무리 추리와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뽑내봐도 헛된 일이다. 제2장 개연성과 원인결과의 관념에 관하여 이상은 과학의 기초인 네 가지 관계에 관해서 내가 논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의 전부이다. 그러나 다른 세 가지 관계는 전연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 동일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도 없어질 수도 있고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인데, 이러한 관계에 관해서는 더욱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 세 가지 관계란 곧 동일, 시간과 위치에 있어서의 상태, 인과이다.
상반과 어떤 질의 정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존재와 비존재가 서로 상살하며 전연 양립할 수가 없고 상반된다는 것은 도무지 의심할 수가 없다. 또 어떤 질의 정도 사이의 차이가 매우 작은 경우에는 가령 색, 맛, 열, 냉과 같은 어떤 질의 정도를 정밀하게 판단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 차이가 상당한 경우에는 그 가운데의 어떤 정도가 다른 정도보다 우월하다든지 더 열등하다는 것을 결정하기란 쉽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을 우리는 아무런 연구나 추리도 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첫 눈에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양이나 수의 비율을 정할 때에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해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히 차이가 매우 크고 현저한 경우에는 우리는 어떤 수나 도형들 사이의 우열을 한번 보아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등이나 정밀한 비율에 관해서는 우리는 단 한 번 고찰해서는 그것을 직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극히 작은 수나 매우 제한된 연장의 경우에 있어서는 예외이다. 그러한 것들은 순식간에 포착되며, 또 거기에서는 우리가 어떤 큰 오류에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모든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는 약간 자유롭게 비율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거나 또는 보다 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므로 우리가 추리의 연쇄를 어느 정도 복잡한 데까지 계속해나가되 그러나 완전한 정밀성과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으로서는 대수학과 산술학이 남을 뿐이다. 우리는 수의 동등과 비율을 판단할 수 있는 정확한 표준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이 표준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이 관계를 결정하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두 수가 서로 결합되어 있되 그 하나가 언제나 다른 수의 모든 단위에 상응하는 단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우리는 그 두 수를 동등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하학이 완전한 그리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과학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연장에 있어서는 그러한 동등의 표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기하학에는 산술학과 대수학에 특유한 완전한 정확성과 확실성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기하학은 우리의 감관과 상상과의 불완전한 판단을 능가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주장이거니와, 여기에서는 이러한 나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일어날지도 모를 곤란을 미리 제거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기하학에 어떤 결함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 근본적인 기초원리가 단지 현상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이러한 결함은 기하학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며 이 결함 때문에 기하학은 대상이나 관념을 비교할 때에 우리의 눈이나 상상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정밀성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결함 때문에 기하학이 확실성에 오르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이 결함이 기하학에 따른다는 것을 자인한다. 그러나 이 근본적 원리는 가장 평이하고 또 가장 거짓이 없는 현상에 의속하는 것이므로 그 결론에 대하여 그 결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정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천각형의 각이 1996직각과 같다고 판정하거나 또는 그만한 비율에 가깝다고 추량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눈으로 보아서 직선은 일치할 수가 없다든가 우리는 주어진 두 개의 점 사이에 하나 이상의 선을 그을 수가 없다든가 하는 단정을 내리는 경우에는 눈의 오류는 결코 그다지 중대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처럼 기하학은 우리를 현상에로 이끌어가되, 그 현상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큰 오류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 기하학의 본성이자 효용이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의 논증적 추리에 관한 두 번째 소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도 똑같은 수학의 대상에 의하여 암시되는 소견이다. 수학자들은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관념은 매우 정치하고 정신적인 성질을 가진 것이므로 상상은 이를 생각할 수가 있고 영혼의 우월한 능력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지적 관조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개연적 지식 흄 David Hume(1711-1776):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철학자. 그의 인과율에 관한 부정적 비판은 칸트를 각성시켰다고 한다. 에딘버러 도서관 사서관. 주불대사 비서, 외무차관을 역임한 바 있다. 주요저술로는 <<인생론>>(A Treaties of Human Nature, 1739-1740), <<도덕 및 정치론집>>(Essays Moral and Political, 1741-1742),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An Inquiry Concering Human Understanding, 1748), <<도덕원리에 관한 연구>>(An Inquiry Concerning the Principal of Morals 1751) 등이 있으며 또 역사연구에도 전념, <<영국사>>(History of England, 1754-1761)의 대작을 남기어 사가로서도 널리 알려졌다. 제1장 지식에 관하여 철학적 관계에는 일곱 가지 다른 종류가 있다. 즉 유사, 동일, 시간과 공간의 관계, 양이나 수에 있어서의 비율, 어떤 질에 있어서의 정도, 상반, 인과가 그것이다. 이들 관계는 다시 두 가지 부류로, 즉 우리가 비교하는 관념에 전적으로 의속하는 관계와 관념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관계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는 바로 삼각형의 관념으로부터 삼각형의 세 각이 이직각과 같다고 하는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우리의 관념이 동일한 동안은 불변적이다. 그와 반대로 두 대상 사이의 접근과 거리의 관계는 그 대상들 자체나 또는 그 관념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단지 그 위치만 바뀌어도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위치는 정신이 예지할 수 없는 허다한 여러 가지 우연사에 달려 있는 것이다. 동일성과 인과성도 마찬가지다. 두 개의 대상은 서로 완전히 유사하며 다른 시간에 동일한 위치에 나타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수적으로는 상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을 산출할 수 있는 힘은 단지 이 대상들의 관념으로부터는 결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원인과 결과는 우리가 어떤 추상적 추리나 반성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알게 되는 관계임이 명백하다. 어떠한 단일한 현상도, 아무리 단순한 현상도, 대상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는 그 대상의 성질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거나 또는 우리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예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3. 양상이거나 실체이거나 관계이다- 복합관념이 아무리 복합되고 다시 복합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수가 무한하고 또 그것이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사고를 채워주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복합관념은 모두 다음의 세 가지 항목으로 나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1. 양상, 2. 실체, 3. 관계가 그것이다.
4. 양상- 첫째로 복합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 속에 스스로 존립한다고 하는 가정을 내포하고 있지 않고 실체에 의존된 것 또는 실체의 성질이라고 생각되는 복합관념을 나는 양상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삼각형, 감사, 살인 따위의 말로 표현되는 관념이 그것이다.... 6. 단일실체와 복합적 실체- 둘째로 실체의 관념은 스스로 존립하는 개개의 특수한 사물들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단순관념들의 결합이요 이 가운데에서는 실체라는 가정적인 또는 혼란한 관념, 예를 들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관념이 언제나 첫째의 주요한 관념이다. 그리하여 만일 실체에 어느 정도의 무게, 경도, 유연성, 가용성을 가진 어떤 희미한 백색이라는 단순관념이 결부되면 우리는 납(鉛)의 관념을 얻는다. 또 운동, 사고, 추리의 능력을 가진 어떤 형태라는 결합이 실체에 결부되면 사람이라는 통상적 관념이 된다. 하나는 단일실체의 관념인데, 이것은 사람이나 양의 관념과 같이 실체가 따로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경우요, 다른 하나는 함께 모인 여러 개의 실체의 관념인데, 사람들의 한 떼라든가 양의 한 무리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여러 실체가 함께 모여서 된 이러한 결합적 관념은 그 하나하나가 한 사람이나 하나의 단위의 관념이나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일한 관념인 것이다. 7. 관계- 셋째로, 마지막 종류의 복합관념은 우리가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관념을 다른 관념과 함께 고찰하고 비교하는 데에 성립한다. 8. 가장 심원한 관념도 이 두 원천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정신의 진보의 자취를 더듬어가서 어떻게 정신이 감각과 반성으로부터 받은 단순관념을 되풀이하고 보태고 결합하는가를 주의하여 관찰한다면 우리는 처음에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진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관념의 기원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심원한 관념이라도 아무리 그것이 감각이나 또는 우리 자신의 정신의 어떤 작용과는 먼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역시 오성이 감각의 대상이나 이 대상에 관한 오성 자신의 작용으로부터 획득한 관념들을 되풀이하고 함께 결합함으로써 스스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나는 믿느다. 그러므로 이러한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관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감각이나 반성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이며 정신이 자기 자신의 능력을 통상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정신의 능력은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또는 정신이 자기 속에 있음을 알고 있는 이들 대상에 관한 작용으로부터 받은 관념에 관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 제12장 복합관념에 관하여 1. 정신에 의하여 단순관념으로부터 만들어진다-우리는 지금까지 정신이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념을 고찰해왔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감각과 반성으로부터 받아들여지는 단순관념이거니와 정신은 이러한 관념을 하나도 스스로 만들 수가 없으며, 전혀 이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정신은 그것이 가지는 모든 단순관념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정신은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단순관념을 소재와 기초로 하여 그로부터 다른 관념들을 만들어내는 그 자신의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정신이 그의 단순관념에 대하여 힘을 행사할 때의 정신의 활동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다. 즉 (1) 여러 개의 단순관념을 결합하여 하나의 복합적인 관념을 만든다. 모든 복합관념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2) 제2의 활동은 단순관념이든 복합관념이든 두 개의 관념을 모아 놓되, 그것을 결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나란히 배열하는 것이다. (3) 제3의 활동은 어떤 관념의 현실적 존재에 있어 그것에 수반되는 일체의 다른 관념으로부터 그 관념을 분리시키는 일이다. 이것을 추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추상에 의해서 정신의 모든 일반적 관념이 만들어진다. 단순관념들은 여러 가지로 함께 결합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정신은 여러 개의 단순관념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것을 하나의 관념으로서 고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더욱이 이것은 이들 단순관념이 외계의 대상에 있어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할 뿐 아니라, 정신 자신이 단순관념들을 결합시켰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기도 하다. 그처럼 여러 개의 단순관념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관념을 나는 복합관념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미, 감사, 인간, 군대, 우주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복합관념은 여러 가지 단순관념들이 뒤섞여서 된 것이기는 하지만 정신이 그렇게 하고자 하면 각각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자적인 전체로서 고찰될 수도 있고 하나의 명칭에 의하여 표현될 수도 있다. 2. 임의로 만들어진다- 정신은 관념들을 반복하고 함께 결합시키는 이러한 능력을 발휘할 때에 감각이나 반성이 부여한 것을 무한히 넘어서서 그의 사고의 대상을 변경하고 확대할 수 있는 큰 힘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힘은 어디까지나 정신이 그러한 두 가지의 원천으로부터 받은 단순관념에 국한된 것이요 이 단순관념이 정신의 모든 구성물의 궁극적 소재인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관념은 모두가 사물 그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물 자체에 관해서는 정신은 정신에 제시되는 것 이상의 것도 또 그 이하의 것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감각적 성질에 관해서는 감관을 통해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떠한 관념도 가질 수가 없으며 사고하는 실체의 작용에 관해서는 정신이 정신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하는 것 이외의 어떠한 다른 관념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정신이 일단 이러한 단순관념을 획득해놓으면 정신은 단지 관찰과 외부로부터 제공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즉 정신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복합관념을 만드는데, 이것은 결코 정신이 그처럼 결합된 채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제2장 단순관념에 관하여 1. 비복합적인 현상이다- 우리의 지식의 성질, 양식, 범위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에 관해서 주의 깊게 관찰되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곧 이 관념 중의 어떤 것은 단순하고 어떤 것은 복합적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2. 정신은 단순관념을 만들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다- 이러한 단순관념은 곧 우리의 모든 지식의 소재이거니와 이것은 기술한 두 가지 방법, 즉 감각과 반성에 의해서만 정신에 떠오르고 정신에 주어진다. 오성은 일단 이 단순관념들을 축적하게 되면 거의 무한히 다양하게 그것을 반복하고 비교하고 결합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복합관념을 임의로 만들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재지와 넓은 오성의 힘으로도, 아무리 재빠르고 다양한 사고로도, 앞에서 말한 방법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하나의 새로운 단순관념을 창안하거나 안출할 수는 없다. 또 오성의 어떠한 힘으로도 이미 있는 단순관념을 파괴할 수도 없다. 자기 자신의 오성이라고 하는 이 소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지배권은 가시적 사물들의 대세계에 있어서와 아주 꼭 같은 것이다. 이 대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힘은 제아무리 기술과 숙련에 의해서 운용된다 할지라도 자신의 손에 닿는 기성소재를 합성하고 나누는 것 이상은 미치지 못하고, 새로운 물질의 극소의 입자를 만든다든가 이미 존재하는 것의 원자 하나를 없애기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감관을 통하여 외계의 대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나 또는 반성을 통하여 외계의 대상에 관한 자기 자신의 정신의 작용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안는 단순관념을 자기의 오성 속에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 속에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라도 자기의 미각을 한 번도 자극해본 일이 없는 어떤 맛을 상상해본다든가, 자기가 냄새를 맡아본 일이 없는 어떤 향기의 관념을 만들려고 노력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도 눈이 먼 사람의 새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귀가 먼 사람이 소리의 참으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짓겠다. 5. 우리의 모든 관념은 이 두 원천 중의 어느 하나에서 나온다-오성은, 그것이 이 두 원천 중의 어느 하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면, 어떠한 관념도 전연 알지 못한다고 나에게는 생각된다. 외계의 대상은 정신에게 감각적 성질에 관한 관념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관념은 외계의 대상이 우리의 내부에 낳아 놓는 여러 가지 지각이다. 또 정신은 오성에게 자기 자신의 작용에 관한 관념을 부여한다. 24. 우리의 모든 지식의 기원-... 이 두 가지 것, 즉 정신의 밖에 있는 외적 대상에 의해서 우리의 감관에 주어지는 인상과 정신 자신에 내재하는 고유한 힘으로부터 나오는 정신 자신의 작용-이 작용도 정신 자신에 의해서 반성될 때에는 정신의 관찰의 대상이 된다.-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지식의 기원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지성의 최초의 능력은 외적 대상에 의하여 감관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든, 또는 정신이 자기 자신의 작용을 반성할 때에 그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든, 정신 안에 만들어지는 인상을 정신이 받아들이기에 적합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어떤 것의 발명을 향해서 내딛는 제1보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자연히 가지게 될 모든 개념을 쌓아올리기 위한 토대이다. 구름 위에 우뚝 솟아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온갖 숭고한 사상도 여기에서 일어나고 여기에 기초를 둔다. 정신이 매우 넓은 범위를 배회하여 사변 가운데에서 고상해진 듯이 보이는 때에도, 정신은 감각과 반성이 정신의 고찰을 위하여 제공한 관념을 조금이라도 넘어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25. 단순개념을 받아들일 때에 오성은 대체로 수동적이다-이러한 부면에 있어서는 오성은 단지 수동적이다. 그리고 오성이 이러한 단서, 즉 이를테면 지식의 소재를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 하는 것은 오성 자신의 힘이 미치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관의 대상은 대다수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특유한 관념을 우리의 정신에 강제로 밀어넣으며 우리의 정신의 작용은 우리로 하여금 적어도 그 관념의 희미한 관념이나마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람도 자신이 사고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전연 모르고 있을 수는 없다. 이러한 단순관념이 정신에 제공될 때에, 오성은 이미 그것을 받기를 거부할 수도 없고, 이 단순관념이 각인될 때에 그것을 변경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을 말살하고 자신이 새로운 것을 만들 수도 없다. 이것은 마치 거울 앞에 놓인 대상이 거울 속에 만들어 놓은 영상, 즉 관념을 거울이 거부하거나 변경하거나 말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체들이 우리의 기관을 여러 가지로 촉발하는 데 따라서, 정신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고 이 인상과 결부되어 있는 관념을 지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07년 12월 초판 1쇄/류전윈 지음 김재영 옮김/황매
중국현대사를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상징과 비유로 그려낸 작품이다. 류전윈의 작품은 한 조직에서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빚어내는가 하는 문제에 천착한다. 이 작품 또한 굵직한 중국현대사의 사건들로부터 영향받은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중국소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역사와 연결된 굵직한 서사가 살아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문학의 성질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나는 소설이란 건 컨텍스트와 연결되지 않으면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다소 거칠긴 해도 우리 작가들이 중국에서 배울 점이 많다. 일본과 같은 소소한 사소설은 좀 그만 읽을 때도 되지 않았나. 한없이 가벼운 것만을 추구하는 요즘의 취향에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얼마전 읽은 <<주술의 사상>>에서 대담을 나누는 두 대가도 일본문학의 그런 경향성에 대해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어떤 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한 번 생각해봄직하다. 번역은 안정감 있게 잘 되었다. 김택규 선생이 중국소설 번역의 '차세대 기린아'로 꼽은 것이 납득된다. 다소 길기는 해도 류전윈의 전작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도전해보시라.
2008년 7월 초판 1쇄/시라카와 시즈카 우메하라 다케시 대담 이경덕 옮김/사계절출판사
중국의 상과 주, 춘추시대까지를 주 배경으로 해서 그야말로 한자의 기원을 따지며 중국의 역사, 문화, 풍속을 누빈다. 대가가 아니고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맥락을 가진 지식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일본의 만엽집이나 고사기와 시경, 초사를 서로 넘나들면서 대화를 주고받는데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았으나 중간중간에 얻은 관점이나 식견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시경에 대한 강의라니. 왕이다. 이런 재미있는 강의라면 얼마든지라도 듣겠다. 판매는 신통치 않을 것이나 나는 완전 몰입해서 읽었다.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다른 책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아, 책이란 건 이런 맛에 읽는 게 아니겠는가.
초판 1쇄 1996년 12월; 개정증보판 3쇄 2008년 8월/권정생 지음/녹색평론사
권정생 선생 이름은 많이 들었어도 동화가 아닌 산문을 온전히 읽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근데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더라.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있나 싶었다. 좋은 의미에서의 근본주의자랄까. 더불어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책들에 대하여 경외의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서평도 아니지만 혹 이 글 읽는 거기 당신, 이 책 안 읽었으면 읽어보시고 녹색평론 구독하시라. 그러면 그게 좋은 일이겠다. 제2권 관념에 관하여 제1장 관념 일반과 그 기원에 관하여 1. 관념은 사고의 대상이다-사람들마다 자신이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고, 또 사고하는 동안에 자기의 정신이 향하는 것은 거기에 있는 관념이므로, 인간이 그 정신 속에 여러 가지 관념, 즉 백, 견고, 감미, 사고, 운동, 인간, 코끼리, 군대, 명정(만취) 등과 같은 말로 표현되는 여러 가지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인간은 그러한 관념들을 획득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맨 먼저 탐구되어야 할 일이다. 내가 알고 있기에는, 인간은 타고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처음 태어날 때에 정신에 원초적인 문자가 찍혀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으로 승인된 학설이다. 이러한 견해를 나는 이미 상세히 검토하였다. 그러나 오성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관념을 어디에서 얻는가, 또 이 관념들은 어떠한 방법과 단계로 정신 속에 들어오는가 하는 문제가 밝혀지게 되면, 내가 전권에서 이미 언급한 것이 아마도 훨씬 더 용이하게 시인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난느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관찰과 경험에 호소하고자 한다. 2. 모든 관념은 감각이나 반성에서 나온다-그러면 정신은 이를테면 아무런 문자도 쓰여 있지 않은, 어떤 관념도 가지지 않은 백지라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해서 이 정신은 관념을 갖추게 되는가? 인간의 다망하고 한이 없는 공상력이 무한히 다양하게 정신 위에 그려놓은 저 광대한 온축을 정신은 어디에서 획득하는 것인가? 추리와 지식의 모든 소재를 정신은 어디에서 얻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나는 한 마디로 경험으로부터라고 대답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바로 이 경험에 기인하며, 종국적으로는 이 경험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외계의 감각적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관찰이나, 또는 우리 자신이 지각하고 반성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의 내부의 작용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관찰이 곧 우리의 오성에게 사고의 소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것이 지식의 기초요,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또는 나면서부터 가질 수 있는 모든 경험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3. 감각의 대상이 관념의 하나의 원천이다-첫째로 개개의 감각적 대상들에 관계하는 우리의 감관이, 이들 대상이 감관을 촉발하는 여러 가지 독특한 지각을 정신 속에 전달해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랗다, 희다, 뜨겁다, 차다, 부드럽다, 딱딱하다, 쓰다, 달다고 하는 관념, 그리고 우리가 감각적 성질이라고 부르는 모든 관념을 획득하는 것이다. 내가 감관이 이것을 정신 속에 전달해준다고 말한 것은, 감관이 이러한 지각을 정신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을 외계의 대상으로부터 정신 속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외계의 대상으로부터 정신 속으로 전달해준다고 하는 의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관념은 전적으로 우리의 감관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 감관에 의해서 오성에 끌어들여진 것이므로, 이러한 관념의 그와 같은 커다란 원천을 나는 감각이라고 부른다. 4. 우리의 정신의 작용이 관념의 또 하나의 원천이다-둘째로 오성이 경험을 통해서 관념을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초는, 오성이 자신이 얻은 관념을 사고하는 일에 종사할 때에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우리 자신의 정신의 작용에 관한 지각이다. 이 작용은 영혼이 그것을 반성하고 숙고하게 되면 외계의 사물로부터는 얻을 수 없었던 다른 일단의 관념을 오성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지각, 사고, 회의, 신념, 추리, 인식, 의지의 제활동과 그 밖에 우리의 정신의 온갖 상이한 활동이거니와, 우리는 이러한 활동을 의식하고 있고 또 이러한 활동이 우리의 내부에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관을 촉발하는 물체로부터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이 판명한 관념들을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우리의 오성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관념의 이러한 원천은 누구나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외계의 대상과는 무관하므로 감관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과 매우 흡사하므로 내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이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관념이란 정신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기 자신의 작용을 반성함으로써 얻는 관념에 지나지 않으므로 나는 다른 원천을 감각이라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원천을 반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논문에서 반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정신의 방식에 관해서 기울이는 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주기 바란다. 정신은 이러한 주의를 함으로 말미암아 오성 속에 그러한 작용에 관한 관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 의견으로는, 이 두 가지의 것, 즉 감각의 대상으로서의 외계의 물질적 사물과 반성의 대상으로서의 내부의 우리 자신의 정신의 작용이, 우리의 모든 관념이 싹터나오는 유일한 기원이다. 여기에서 이 작용이라는 말을 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여 단지 정신이 그 관념에 관해서 하는 활동뿐 아니라 때로는 이러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어떤 격정, 즉 어떤 사고에서 일어나는 만족이나 불안과 같은 것도 포함시킨다.
5. 어린이들이나 백치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나면서부터 정신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모든 어린이들과 백치들은 이렇나 명제들을 조금도 이해하거나 사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생득적 진리에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보편적 동의를 파괴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영혼에 각인되어 있으나 영혼이 지각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나에게는 모순에 가까운 것같이 생각되고, 또 만일 각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진리로 하여금 지각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에 어떤 것을 각인하되 정신이 그것을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보인다. 그러므로 만일 어린이들과 백치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고 정신에 각인된 이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지각할 수밖에 없고 또 필연적으로 그러한 진리를 알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므로 그러한 인상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만일 그것이 나면서부터 각인된 개념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 그것이 생득적일 수 있을까? ... 어떠한 명제도 정신이 아직 인식한 일이 없고 저인이 아직 의식한 일이 없는 것이면 정신 속에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정신이 아직 의식한 일이 없는 어떤 명제가 정신 속에 있을 수 있다면 그와 똑같은 이유로 참되며 정신이 언젠가는 동의할 수 있는 모든 명제는 정신 속에 있으며 각인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정신이 아직 인식한 일이 없는 어떤 명제가 정신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오로지 정신이 그 명제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해서 그러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이 언젠가는 인식하게 될 모든 진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렇게 되면 정신이 인식한 일도 없고 또 앞으로 인식하게 되지도 않을 진리도 정신에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오래 산다 해도 그의 정신이 인식할 수 있었던 많은 진리를 결국은 인식하지 못하고 죽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일 인식의 능력이 곧 우리가 지금 논쟁하고 있는, 나면서 가지는 인상이라면 사람이 언젠가는 인식하게 될 모든 진리는 이런 이유로 해서 그 하나하나가 모두 생득적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오성 속에 생득적 관념이 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의 말은 (그가 생득적 개념이 어떤 명확한 진리라고 말할 셈으로 있다 하더라도) 오성이 지각한 일도 없고 또 아직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한 진리가 오성 속에 있다고 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즉 오성 속에 있다<to be in the understanding>)이 어떤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이해되고 있다(to be understood)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성 속에 있으면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 정신 속에 있으면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 정신이나 오성 속에 있으면서도 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만일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존재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 존재하며 또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이 두 명제가 나면서부터 각인된 것이라면 어린이들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유아들과 영혼을 가진 모든 것들이 반드시 그들의 오성 속에 이 명제를 가지고 있고 그 진리를 인식하며 그것에 동의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
by 다오얀 메모장
공지사항 카테고리
최근 등록된 덧글
녹색평론 저도 맨날 도서..
by 허난시 at 10/02 점점 더 멀어지면, 출근은.. by JIYO at 08/11 근자에는 과학적 발견들.. by 조염 at 07/15 아라크네 출판사입니다. .. by 너불 at 06/16 우리 마눌도 그 혹자 가운.. by 다오얀 at 05/22 재밌게 읽었어요. 혹자는.. by 한솔로 at 05/21 작년에 중국서 인터넷으.. by 허난시 at 05/15 뮤탄트/네. 부끄러운 솜.. by 다오얀 at 05/06 형님, 수진이예요. 오.. by sirocco at 05/02 벌써 나왔군요. 애쓰셨.. by JIYO at 05/02 이글루 파인더
| |||